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글검색결과 [원진희] : 2

  1. 2006/05/08 그림자의 노래, 열두 번째
  2. 2005/05/02 그림자의 노래 두 번째
그림자의 노래, 그 남자 이야기 12

갑자기 마음 한 쪽이 싸하게 아려왔다. 저 눈, 더럽혀지지 않은, 굽힘없이 빛나던 그 눈, 음악을 이야기하며 생기로 반짝이던 남자의 눈이, 변함없이 곧은 빛을 품고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저 눈을 알고 있었다. 저런 눈으로, 입으로 나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지금 그 얼굴을 떠올리고 마는가.

"…저는…!"

눈과 같은 말을 하려고 입술이 열렸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젖은 눈에서 물기를 떨어낸다. 울지 않아. 원진희 때문에 울지 않아. 그러니까 너는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아선 안돼.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입술을 곱씹으며 말했다.

"이건 내 문제야. 무슨 의도로든 제 3자가 끼어드는 건 사양이야."

다정한 선배의 얼굴을 거두고 차갑게 말을 뱉았다. 가방을 바투 쥐고 어쩔 줄 몰라 입술을 떠는 그 얼굴에서 돌아섰다. 학과 사무실에 들르자, 교수님을 뵙자, 그런 일들을 중얼거리며 나는 내 등 뒤를 계속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수업에 다시 복귀해서, 의외로 모든 것이 너무나 변하지 않은 것에 놀랐다. 텍스트는 쌓여 있었고 해야 할 과제도 몇 건인가 있었지만, 오래 자리를 비운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내게 묻는 사람도, 호기심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원래 논문의 결과가 가장 신경쓰이게 마련인 원생들에게 동기가 수업에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교수님의 새 원고가 마무리되었을 즈음에는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지윤아."

완성된 원고가 든 메모리 스틱을 받고 나서 교수님이 나를 보았다.

"현진이, 지금 우리 집에 있는 거 알고 있냐?"
"…네."

뭐라 대답할 지 몰라 한참 후에야 맥없이 대답했다.

"어제, 가위에 눌렸다."

주어가 생략된 말.

"안 돼, 지윤아, 안돼, 라고."
"……."
"…그리곤 울더라. 한참 울다가…, 엄청난 얼굴을 하고는 도로 잠들었다."
"…상태는 어떤가요?"

머뭇거리다 물었다. 교수님은 한참 나를 보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나고 싶은 게 아니냐고, 불러올까 그랬는데 대답을 안 하더라. 그냥 고개만 젓고. 고등학교 때 같아. 고집스럽게 뭔가 생각하는데 말을 안해. 입을 아예 닫은 것 같이."

나는 현진선배의 고등학교 시절을 모른다. 내가 아는 선배는 늘 웃고 있었고, 내 일로 화를 내 주었고, 내 사물함 앞에 포스트잇으로 힘내라고 격려의 말을 남겨놓던 사람이다. 선배가 나를, 세상을 거부하다니. 선배가 말을 닫다니.

선배가 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부디 아니길 바라는 거다 이것은. 선배가 그 때 깨어 있지 않았었다고, 선배가 깨어난 건 내게 말을 건넨 그 순간이고-, 그 전에는 어떠한 것도 선배는 몰라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 뿐이다.

"와 주지 않겠냐. 무슨 핑계를 대도 괜찮다. 이 원고라도…."

교수님이 처음으로 내게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선배를 낫게 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선배가 그렇게 된 건, 밤의 차도에 다시 뛰어든 건 내가 준 열쇠고리 때문이었고-, 지금도 선배가 가위에 눌리는 건 나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학과 사무실에 네 우편물이 있던데. 조교가 매번 잊어버렸다고 난처해 했다."

교수님이 말을 돌렸다. 나는 안도한다.

"또 일 생기면 연락하마. 핸드폰 꺼 놓지 마라."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자 조교가 날 보고 가볍게 목례했다. 김태원은 취직하면서 사직한 전 조교의 빈자리에 6월부터 온 동기생이었다. 학부가 달라서 동기라고 해도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별로 없고, 서로 아직 존대를 쓰는 사이였다. 학부생 몇 명이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가 게시판을 훑고 있고, 김태원과 같은 언어학과 출신인 이주형이 소파에 앉아서 전공 서적 몇 권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한참 있어도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또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아직 내 얼굴과 이름을 연결시키지 못하거나.

"우편물이 온 게 있다고 하던데요."

내가 말을 꺼내자 그제야 아, 하고 벌떡 김태원이 일어났다.

"부피가 꽤 커서, 연락을 한다고 하고 자꾸 잊어버렸네요."

두툼한 소포뭉치였다. 발송자도, 발송 주소도 없이 굵은 글씨로 수취인란에 학교의 주소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나서야 그 글씨가 눈에 익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류처럼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더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어째서 네가, 어째서 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피에 비해 가벼운 뭉치가 내 손에 들려서, 더할 나위 없는 존재감으로 밀어닥쳐서.

"논문 준비 시작했어요?"

이주형이 대뜸 내게 물었다.

"아니오, 아직…."

멍하니 대답했다.

"다행이다. 나도 전혀 못해서."

반말도 존대도 아닌 얼버무림으로 이주형이 웃었다.

"태원이 이 자식이 막 압박 줘서. 혼자 놀고 있는 놈 취급을 하고."
"…3학기 때 시작하면 빠듯하다고들 하니까…, 슬슬 시작해야 하긴 하죠."

나는 웃으며 김태원의 편을 들어 주고는 말을 돌렸다.

"그럼 고맙습니다, 내일 수업 때 보죠."

학과실을 나오는데 후끈한 열기가 숨을 파고든다. 여름이다.

허둥대며 지하철을 탔다. 이어폰을 꽂았다. 누군가가 날 불렀던 것 같았지만 모른척 귀를 막았다. 시이나 링고의 스산한 소리가 귀를 채웠다. 새로운 음악을 듣고 새로운 커피를 마시고, 새로운 사람과…, 그러나 여전히 내 손에는 끊어지지 못한 글씨가 무겁게 낙인뒨 우편물이 있다. 땀을 흘리며 문을 열고는 털썩 대자로 누웠다. 바닥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등이 차가웠다. 거칠게 날 밀어올렸다. 병실의 차갑고 축축하던 공기 속에서 원진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당연히 그에게 안기리라 여겼을까. 더 이상은 싫다, 고 말했는데도.

가위로 소포를 끊었다. 포장 안에 든 건 쇼핑백이었다.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상표의 구겨진 쇼핑백 안에 잘 개어진 청바지가 들어 있었다. 내 치수였다. 너무 짙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은 색. 손 끝에 만져지는 촉감이 부드러웠다. 분명 고가품일 게다. 티셔츠 하나도 싼 것을 입지 않는 그였다. 그저 물쓰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제력을 향유했다. 그가, 내게 이 바지를 보낸 것이다. 원진희, 그가.

그는 모를 것이다. 세상에는 지하철 한 구간의 요금 때문에 오십여분을 걷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홈플러스의 이월 상품 할인에 맞춰 판매하는 칠천원짜리 운동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멋부리는 것과 다른 이유로 머리를 기르는 사람, 대학 교재를 산 달에는 학관 식당 국수로 점심 저녁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시디 한 장에 손이 떨리고 계절이 바뀌면 지난 해의 옷이 아직 맞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틀었다. 온 몸에서 닭살이 도도독 돋았다. 이가 부딪히도록,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도록 계속 계속 찬 물줄기를 맞으며 그냥 나는 그렇게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도록,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원진희가 했던 그 눈빛을, 놀라고 상처입은 그 얼굴을 떠올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2006/05/08 10:35 2006/05/08 10:35
“당연히 너와 같이 살 생각이었어. 네가 다른 사정이 있는 거라면…, 새 상대가 생겼다거나.”
“그것과는 상관없어, 원진희. 나는, 이제는 너랑은 싫다고.”

나는 일어선다. 커피향이 쓰기 때문이다. 순을 지나고 산페기로 들어가 버린 원두의 변한 향이 거슬려서다. 그래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버리는 거다.

“지윤아!”

그가 내 어깨를 붙든다. 그 손이 뜨겁다. 심장이 손에 달린 사람마냥 박동치는 열기가 내 어깨로 퍼진다. 열정이거나, 혹은 독이거나, 나는 항상 그의 손에 약했다. 저 눈빛도. 마치 나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애타게 갈구하는 눈빛에.

“싫어할 리가 없어. 너는…, 1년 전에도 늘….”

좋아했잖아. 한 번도 나를 거절한 적 없잖아. 항상 허리를 감으며 응했잖아. 달뜬 소리를 내면서.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조금 입술을 깨물었다.

“나랑, 자고 싶어?”

그의 눈을 보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섣부른 희망을 갖지 않겠다. 그의 대답은 항상 그 사항 하나에 대한 것일 뿐이어서, 해석하거나 미루어 짐작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의 손을 내 어깨에서 치우고 익숙한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씻지 않은 채로 안기는 것을 싫어하고, 그는 날 안은 후에 몸을 씻는다.

1년 동안 목욕용품의 회사가 바디샵에서 아베다로 바뀌어 있을 뿐, 물건이 놓인 위치나 가득한 프리지아 향은 그대로다. 르네휘테르의 샴푸, 아베다의 샤워젤. 세면대 옆에 놓인 로션은 예전과 똑같은 폴로. 1년이 지나지 않았으면,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었을까.

퀸사이즈 침대에서 그는 나를 안았다. 여름의 먼지 냄새가 머리카락 사이로 스치지만 그의 체취는 변하지 않았다. 내 가슴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젖은 손가락으로 나를 열고,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소리 내지 않는다.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꿈틀대는 그가 나를 누르고 압박해도, 나는 무표정하게 입술을 깨물 뿐이다. 내 눈이 흔들리지 않기를, 내 젖은 눈을 그에게 들키지 않기를.

“…지윤아, 왜 그래?”

급기야 그가 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도리질한다. 거친 호흡이 내 목에 닿는다. 그가, 무너진다. 뜨겁게 내 안으로 그가 퍼진다.

“…원진희, 날 사랑해?”
“…뭐?”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해서, 욕실로 들어가려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그를 보았다. 사실은 다른 것이 묻고 싶었다. 긴머리의 두 살 아래 여학생, 최나영, 너는 그 애를 안았었냐고.

“일본에서 다른 사람 안은 적 있니?”

그는 두 개의 물음에 다 대답하지 않는다.

“갑자기 왜 그래, 새삼스럽게. 그럼, 1년이나 되는 기간인데, 내가 수도라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하고도 잔 적 없다면?”

“자의로?”

그의 되물음, 악의를 담지 않은 듯하지만 조소를 함뿍 머금고 있는 그 말에 돌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이것으로 상황종료. 더 이상 확인할 것도, 물어볼 것도 없다. 처음부터 선명하게 보였었다. 그걸 피한 건 내 쪽이었다.

“지윤아, 너….”
“됐어, 씻어.”

나는 자는 시늉을 하고, 시트를 뒤집어 썼다.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리 없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밤 여덟 시 반, 나는 열쇠를 키홀더에서 빼서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곳을 나왔다. 욕실의 물소리와 나카시마 미카의 노랫소리는 문소리를 감추어 줄 것이다.

거리로 나오다가 나는 슬쩍 길의 외곽으로 벗어났다. 슬리브리스 원피스에 레이스 가디건을 살짝 걸치고 또박도박 어딘가로 향하는 여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최나영, 그가 돌아온 소식을 들었겠지. 그의 오피스텔을 알려 줄 사람은 많다. 이제 졸업반이 된 최나영은 그 열쇠를 받게 될 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나는 그와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양대 역에서 내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전철역 근처에는 소리 높여 노래하는 청년들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새내기들도 없다. 이 곳은 교통이 좋은 편이다. 이현진 선배로부터 이 곳의 방을 빌릴 수 있던 건 행운이었다. 후배들은 깐깐하다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유일하게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던 상대가 선배였다. 선배는, 지금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 있다. 2년 반이라는 어머니의 파견 근무에, 선배는 좋은 기회라고 동행을 결심했다. 박사과정에 시험을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배도 원진희처럼 갑작스럽게 떠났다.

- 지윤아, 가능하면, 나는 여기서 네가 살아줬으면 좋겠다.

선배를 도와 짐을 꾸리고 있을 때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고시원 방에서 점점 말라가던 내게 그 말은 구원이었지만, 그는 마치 내게 곤란한 부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와 함께 침대며 옷가지를 작은 골방에 모두 쑤셔넣고, 텅 빈 책상만을 남겨 둔 방에서 그렇게.

- 싫어?
- 싫을리가요. 어차피 혼자 살고요. 그런데 집세는 어느 정도로? 저, 많이는 드릴 수 없어요.
- 집세는 무슨, 내가 오히려 관리 비용을 주고 싶을 정도인데.

무엇이든 내 것이 있었던가.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이 땅에서.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20층에서 멈춰 내려오지 않는다. 나는 13층까지 걸어서 올라간다. 7층 정도에서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고, 더 이상은 갈 수 없다는 한계 상황이 될 때가 13층이다. 12평 오피스텔. 굳게 열쇠로 닫혀 있는 방을 제외하면 내가 쓸 수 있는 실제 공간은 8평 남짓이다. 그것도 내게는 과분하다. 욕실에서 새로 샤워를 한다. 그의 흔적과, 그가 사용하는 목욕용품의 향기까지도 모두 씻어내도록 몇 번이나 물을 뿌려댄다. 나도 모르게 콜록 기침을 하고 나서야 보일러를 켜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은 5월이 아니라 한여름처럼 더워도 아직 찬물 샤워는 이른 시기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커다란 타월로 둘둘 감싸고 방으로 들어와 몸을 웅크렸다.
2005/05/02 15:55 2005/05/0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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