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갑작스럽게 야근이 있었다. 덕분에 1시간 넘게 늦은 시간에 퇴근길에 올랐다. 학교와 집을 갈아타지 않고 갈 수 있는 버스는 한 대. 배차간격 25분에다 노선이 길어서 도착시간을 예측하기조차 힘든 버스다. 용케 육교를 내려서는 순간에 그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학교가 종점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보통은 두 정류장 정도를 지나면 좌석에 앉을 수 있는데, 오늘따라 계속 자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말 문득,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네버랜드를 찾아서. 다 필요없이, 죠니뎁이니까- 라고. 그래서 고개를 들어보니 영화관에 가야 하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버스에서 내렸다. 영화관으로 가는 길은 도로 거슬러 가야 하지만 오늘따라 방향을 틀어 낯선 길로 들어섰을 때, 갑작스럽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 xxx 선생님 아니세요?"

그리운 얼굴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H는 내가 처음 발령을 받은 여중의 학생이었다. 담임을 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나한테 살갑게 붙어오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수업시간이면 이따금 H의 표정이 심각해 질 때가 있어서, 눈에 띄었던 걸로 기억한다. 선생님들은 H에 대해서 물으면 별 말씀이 없으셨다. 성적이 좋거나 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간부 같은 것을 하는 학생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2년째, 그 학교는 지옥이었다. 부서의 인원은 돌연 5명에서 3명으로 감축되었고, 일손은 턱없이 모자란데도 같은 부서의 사람 한 명은 일손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갑자기 돌기 시작한 바이러스... CIH. 담임은 하지 않았지만 업무는 쉴 새 없이 몰아쳤다. 교재 연구를 할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 나는 새로 들어간 야간대학 3학년이었다. 전공 공부를 할 시간은 주말 뿐이었다. 이쪽도 저쪽도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허덕거리다가, 급기야 수업 시간에 터져버렸다.

무엇때문에 터져버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면 억지로 묻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기억나는 건, 반 한 반에 대해서, '미친 듯이' 화를 낸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망치듯이 고등학교 전보 신청을 내기로 했다. 고등학교를 특별히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 곳에 있는 것이, 나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그것을 발산해야 할 곳은 학생들이 아니었을 거다. 설사 학생들이 내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해도, 내 가장 큰 스트레스는 학생들이 아니었으므로.

화를 낸 (야단을 친, 이 아니다. 그 때 내 행동은 분명 '화냄'이었다.) 그 다음날, 다행히 그 반에 수업이 없는 것에 기뻐하면서 나는 일을 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H가 내게 다가와, 불쑥 스켓치북을 내밀었다. 6절 종이에, 가나 초콜렛이 연필 뎃생으로 그려져 있었다.

"기운 내시라구요 선생님. 초콜렛 좋아하시죠? 먹는 건 못 드리지만 이거 받아주세요."

아마 그런 말이었던 듯하다. 나는 일을 하느라 바빴으므로 갑자기 막막해질 만큼 벅차는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냥 고맙다, H. 하고 말하고 웃었다. ...그 때 내가 정말 웃긴 웃었던가.

H는 인문계에 진학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리 넉넉하지 못한, 아니 가난이라는 표현이 맞을 H는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이었지만, 학원에서 배운 그림은 아니었다. 내 뒷자리의 미술선생님은 H가 미술에 감각이 있긴 한데, 실업계로 진학하면 미술 계속 하긴 힘들거라고, 옅게 한숨을 내 쉬었다.

졸업하는 날, H는 나를 찾아왔다.

"그림 그려라, H."
"예. 꼭이요."

H는 웃으며 졸업했다. 나는 학생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교무실에 있었다. 첫번째 아이들을 졸업시키는 순간인데도, 나는 담임이 아니었으므로 부외자 같았다. 아이들이 몇몇 사진을 찍고 우르르 빠져나갔다.

H는 올해 스무살이었다. 나는 H가 졸업 후에 한 번도 연락을 해 오지 않은 것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H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고작 몇 번 뿐이었고. 나는 H에게 준 것이 없었고 H는 내게 준 것이 많았다. 비닐 봉지를 들고 지나가던 H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준 것이 반가워서, H가 내민 핸드폰에 내 번호를 찍었다.

"선생님, 그 때 다니던 대학은 졸업 하셨어요?"

기억하고 있구나. 나는 그저 응, 졸업해서, 지금은 대학원 준비하지. 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니? 올해 고등학교 졸업 했겠구나."
"예, xx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어요. 화방 가는 길이었는데 선생님이 보여서요."

아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구나. 그 말이 가장 반가웠다.

그리고 몇 마디를 선 자리에서 나누었다. 영어가 많이 딸려서 공부를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 어디 영어 학원이 괜찮다고 소개를 해 주고.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H는 나를 만나고 싶어서 졸업후 중학교로 갔지만, 내 연락처는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졸업한 직후가 아니어서였는지 내가 어느 학교로 전근갔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단다. 으응, 그랬구나. 웃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간 길에 내 얼굴을 떠올렸을까. 말 수가 적고 눈이 빛나던 그림 그리는 H가, 졸업 후에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그저 반갑고 고맙다.

"그럼 저, 다음에 꼭 찾아 뵙겠습니다. 건강하시고요 선생님."
"그래, 또 보자."

웃으며 녀석을 배웅하면서 생각했다. 오늘 내가 그 버스를 탄 것은 갑작스럽게 야근을 했기 때문이었고, 버스에서 내린 건 좌석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불현듯 죠니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항상 가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바로 그 시간에 거기 있게 해 준 수많은 우연 끝에 나는 H를 만난 것이다.

H를 만나게 해 준 기적에 감사하면서, 또 하나의 기적을 조심스럽게 바란다.
H를 또 만날 수 있기를,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난 후더라도.
2005/05/08 19:43 2005/05/0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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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먼여행 2006/03/08 19:43 댓글수정 또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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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ed by 로무 at 2005-03-09 01:13 x
    좋았겠다-
    Commented by Imperan at 2005-03-11 13:25 x
    누가 뭐라해도, 누나는 멋진 선생님이야.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않아.
    Commented by LORAIN at 2005-03-15 12:16 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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