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그림자의 노래, 그 남자 이야기 두 번째

때로 잊어버리고자 하는 일들은, 잊고 싶지 않은 것보다 더욱 더 선명하게 각인되어 뇌리에 남는다. 1학년 때의 일들이 그랬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 이후로 그와 마주쳤던, 혹은 스쳤던 순간이 하나 하나 지금까지도 생생한 것이다. 잊어버릴라 치면 꿈에 나타났고, 잊으려 하면 그 장소를 지나쳤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현진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바삭한 토스트와 반쯤 노른자를 익힌 달걀 프라이가 우묵한 유리 그릇에 덮여 있었다. 선배가 즐기는 핑크색 하트 모양 포스트잇도 거기에 붙어 있었다. 영국에 가서조차 이 습관은 바뀌지 않았구나. 항상 선배의 가방 안에 핑크색 하트형 포스트잇이 들어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배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때로는 학회실 문에 “한지윤, 수업 마치고 서클실로 와라!” 라는 메모가 붙어 있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내 자리에 “45도 각도에 나 앉아 있다. 오면 커피값으로 손 한 번 흔들어 줄 것.” 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기도 했다. 그 메모가 선배인 듯이 반가워서 씻기도 전에 유리 그릇을 열었다. 아직 토스트에도, 달걀 프라이에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커피를 볶았다. 가스렌지에 불을 붙이고, 망사로 된 로스팅 기구에 한 번 마실 양의 생두를 넣고 볶는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세기, 원두를 볶는 방법이라는 건 그래서 애매하다. 사람마다 적절한 세기는 다를 수 있다. 생두의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그 날의 습도에 따라서도 조금씩 변한다. 푸른빛이 감도는 모래빛 생두가 윤기를 머금은 진갈색으로 변하는 것은 때로 경외심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따뜻한 원두를 핸드밀로 드륵드륵 갈고 있으면 얼핏 새어 나오는 아득한 커피 향에 정신을 놓고 싶어질 정도다.

새하얀 도자기 드리퍼에 거름종이를 깔고, 막 갈아낸 원두를 올린다. 서버 위에 드리퍼를 놓고, 갈린 원두 위에 끓는 물을 둥글게 부으면, 물기를 머금은 원두가 불어나면서 고운 거품이 일어난다. 그 빛깔을 뭐에 비교하면 좋을까. 황금빛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그 짙은 거품, 하나하나가 모두 향으로 만들어 진 것 같은. 천천히 원두 위로 떨어지는 물은 갈린 원두를 지나면 짙은 갈색의 커피 액으로 떨어진다. 이 순간이 가장 좋았다. 원두를 볶고, 갈고, 한 잔의 커피를 준비하는 시간. …그는 커피를 내리는 나를 물끄러미 보곤 했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을 느끼는 걸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커피를 내렸다. 현진 선배도 그랬다. 현진 선배의 집에서 처음 커피를 볶았을 때에도, 선배는 빙그레 웃으며 등 뒤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궁금해진다. 그 두 사람, 내 등을 왜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한 마디 말도 안 하고서.

토스트를 계란 노른자에 적셔 먹고 있으니 핸드폰이 삑삑거리고 울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별로 없다. 어머니는 전화를 할 테고, 대부분의 후배 녀석들이나 선배들도 전화를 먼저 하는 편이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한 사람.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대부분 하나였다. 먹던 토스트를 내려놓고 책상 위 충전기에 꽂혀 있는 핸드폰을 열었다. 최신형 카메라가 달렸거나 mp3p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 핸드폰은 내게 필요 없다. 전화를 걸고자 하는 사람들과 문자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두 가지 기능만으로 충분하다. 지금은 회사 이름조차 바뀌어 버린 중소기업의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 연구실에 들를 것.

눈에 익은 번호. 교수님이었다. 4학년 때 드라마 수업을 들은 인연으로 대학원 지도교수가 되고, 지금은 내가 조교로 일하고 있는 사람. 지금 현재 내 가장 큰 수입원이기도 한 사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문자로 오고 가지 않는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라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지만 행로를 수정한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다른 하나의 충전기에서 CDP의 여분 배터리를 챙기고, 남은 토스트를 마저 먹고 나서야 아직 세수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피식 웃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선배가 가장 먼저 보는 냉장고 앞에다 노란 포스트잇을 붙였다. 선배에게서 배운 버릇이다.

- 학교에 가요. 늦을 지도 모르구요.
p.s. 토스트랑 계란 맛있었어요.
저녁 굶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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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절반만 먼저 올려둡니다.
2005/05/18 16:00 2005/05/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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