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당연히 너와 같이 살 생각이었어. 네가 다른 사정이 있는 거라면…, 새 상대가 생겼다거나.”
“그것과는 상관없어, 원진희. 나는, 이제는 너랑은 싫다고.”

나는 일어선다. 커피향이 쓰기 때문이다. 순을 지나고 산페기로 들어가 버린 원두의 변한 향이 거슬려서다. 그래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버리는 거다.

“지윤아!”

그가 내 어깨를 붙든다. 그 손이 뜨겁다. 심장이 손에 달린 사람마냥 박동치는 열기가 내 어깨로 퍼진다. 열정이거나, 혹은 독이거나, 나는 항상 그의 손에 약했다. 저 눈빛도. 마치 나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애타게 갈구하는 눈빛에.

“싫어할 리가 없어. 너는…, 1년 전에도 늘….”

좋아했잖아. 한 번도 나를 거절한 적 없잖아. 항상 허리를 감으며 응했잖아. 달뜬 소리를 내면서.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조금 입술을 깨물었다.

“나랑, 자고 싶어?”

그의 눈을 보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섣부른 희망을 갖지 않겠다. 그의 대답은 항상 그 사항 하나에 대한 것일 뿐이어서, 해석하거나 미루어 짐작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의 손을 내 어깨에서 치우고 익숙한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씻지 않은 채로 안기는 것을 싫어하고, 그는 날 안은 후에 몸을 씻는다.

1년 동안 목욕용품의 회사가 바디샵에서 아베다로 바뀌어 있을 뿐, 물건이 놓인 위치나 가득한 프리지아 향은 그대로다. 르네휘테르의 샴푸, 아베다의 샤워젤. 세면대 옆에 놓인 로션은 예전과 똑같은 폴로. 1년이 지나지 않았으면,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었을까.

퀸사이즈 침대에서 그는 나를 안았다. 여름의 먼지 냄새가 머리카락 사이로 스치지만 그의 체취는 변하지 않았다. 내 가슴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젖은 손가락으로 나를 열고,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소리 내지 않는다.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꿈틀대는 그가 나를 누르고 압박해도, 나는 무표정하게 입술을 깨물 뿐이다. 내 눈이 흔들리지 않기를, 내 젖은 눈을 그에게 들키지 않기를.

“…지윤아, 왜 그래?”

급기야 그가 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도리질한다. 거친 호흡이 내 목에 닿는다. 그가, 무너진다. 뜨겁게 내 안으로 그가 퍼진다.

“…원진희, 날 사랑해?”
“…뭐?”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해서, 욕실로 들어가려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그를 보았다. 사실은 다른 것이 묻고 싶었다. 긴머리의 두 살 아래 여학생, 최나영, 너는 그 애를 안았었냐고.

“일본에서 다른 사람 안은 적 있니?”

그는 두 개의 물음에 다 대답하지 않는다.

“갑자기 왜 그래, 새삼스럽게. 그럼, 1년이나 되는 기간인데, 내가 수도라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하고도 잔 적 없다면?”

“자의로?”

그의 되물음, 악의를 담지 않은 듯하지만 조소를 함뿍 머금고 있는 그 말에 돌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이것으로 상황종료. 더 이상 확인할 것도, 물어볼 것도 없다. 처음부터 선명하게 보였었다. 그걸 피한 건 내 쪽이었다.

“지윤아, 너….”
“됐어, 씻어.”

나는 자는 시늉을 하고, 시트를 뒤집어 썼다.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리 없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밤 여덟 시 반, 나는 열쇠를 키홀더에서 빼서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곳을 나왔다. 욕실의 물소리와 나카시마 미카의 노랫소리는 문소리를 감추어 줄 것이다.

거리로 나오다가 나는 슬쩍 길의 외곽으로 벗어났다. 슬리브리스 원피스에 레이스 가디건을 살짝 걸치고 또박도박 어딘가로 향하는 여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최나영, 그가 돌아온 소식을 들었겠지. 그의 오피스텔을 알려 줄 사람은 많다. 이제 졸업반이 된 최나영은 그 열쇠를 받게 될 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나는 그와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양대 역에서 내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전철역 근처에는 소리 높여 노래하는 청년들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새내기들도 없다. 이 곳은 교통이 좋은 편이다. 이현진 선배로부터 이 곳의 방을 빌릴 수 있던 건 행운이었다. 후배들은 깐깐하다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유일하게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던 상대가 선배였다. 선배는, 지금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 있다. 2년 반이라는 어머니의 파견 근무에, 선배는 좋은 기회라고 동행을 결심했다. 박사과정에 시험을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배도 원진희처럼 갑작스럽게 떠났다.

- 지윤아, 가능하면, 나는 여기서 네가 살아줬으면 좋겠다.

선배를 도와 짐을 꾸리고 있을 때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고시원 방에서 점점 말라가던 내게 그 말은 구원이었지만, 그는 마치 내게 곤란한 부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와 함께 침대며 옷가지를 작은 골방에 모두 쑤셔넣고, 텅 빈 책상만을 남겨 둔 방에서 그렇게.

- 싫어?
- 싫을리가요. 어차피 혼자 살고요. 그런데 집세는 어느 정도로? 저, 많이는 드릴 수 없어요.
- 집세는 무슨, 내가 오히려 관리 비용을 주고 싶을 정도인데.

무엇이든 내 것이 있었던가.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이 땅에서.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20층에서 멈춰 내려오지 않는다. 나는 13층까지 걸어서 올라간다. 7층 정도에서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고, 더 이상은 갈 수 없다는 한계 상황이 될 때가 13층이다. 12평 오피스텔. 굳게 열쇠로 닫혀 있는 방을 제외하면 내가 쓸 수 있는 실제 공간은 8평 남짓이다. 그것도 내게는 과분하다. 욕실에서 새로 샤워를 한다. 그의 흔적과, 그가 사용하는 목욕용품의 향기까지도 모두 씻어내도록 몇 번이나 물을 뿌려댄다. 나도 모르게 콜록 기침을 하고 나서야 보일러를 켜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은 5월이 아니라 한여름처럼 더워도 아직 찬물 샤워는 이른 시기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커다란 타월로 둘둘 감싸고 방으로 들어와 몸을 웅크렸다.
2005/05/02 15:55 2005/05/0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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