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그가 1년 반 만에 학교로 돌아왔다. 아직 오월인데도 날은 찌는 듯이 무더워서, 올해는 백년 만의 무더위가 될 거라고 뉴스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여름이 오기 전에 떠났던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이 곳으로 돌아올 줄은.

“건강해 보이네.”

그가 내게 악수하면서 건넨 말이었다. 맙소사. 건강해 보인다고? 일년 동안 나는 계속 앓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종종 너무나 낯설어서 세수를 하고 나서도 거울을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1년 만에, 키가 10센티나 자란 그가 내게 ‘건강해 보이네’라고?

“여전히 커피 좋아하니? 거기서 커피를 좀 사가지고 왔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 앞서 걸었다. 내가 따라올 거라는 데는 일말의 의심도 없는 듯이 문을 열어서 나를 제 방 안으로 안내했다. 1년 만에 새로 장만한 그의 방에는 아직 그의 체취가 채 배지 않았다. 오래 비워둔 방의 을씨년스런 냄새 사이로 코에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1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원 진희.”
“여전히 사람을 부를 때 성을 붙이는구나, 지윤아.”

그, 원진희는 반가운 것을 만난 사람처럼 웃으면서 창가 선반에 놓여 있는 전기 포트에 물을 끓였다. 새하얀 백색 도자기 드리퍼와 투명한 유리 서버, 그가 사용하는 착색하지 않은 연갈색의 종이 필터 위로 드륵 드륵 방금 갈린 원두가 놓였다. 거기에서 사 온 원두라면 이미 순은 지나 있을 것이고, 그걸 막 갈아서 드립한다고 해도 원두의 제맛을 느끼기에는 무리다. 하지만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스텐리스 재질의 칼리타 포트가 원두 위로 부드러운 원을 그리며 물을 떨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 신선한 원두의 금빛 거품도 없다. 틀렸어 원진희, 내가 마셨던 커피는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좋아했던 건 케냐의 원두지만, 네가 볶은 채로 사 온 원두는 이미 그 맛을 잃었어. 그러니 네가 아무리 정성껏 내게 그 커피를 대접하려고 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아. 그러니까 내 흉내는 그만해. 칼리타의 커피 도구를 가르쳐 준 것도 나, 쇼핑몰에서 전기 포트 중에 뭐가 제일 좋은지 뒤진 것도 나, 원두를 드립하는 그 자세도 바리스타들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잖아.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음악을 켰다 18평 원룸. 대학원생인 데다 다른 수입이 없는 그가 사용하기에는 사치에 가까웠지만, 그는 한 번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MD가 들어가는 CD 콤포넌트를 일본 여행길에 보고 맘에 들었다고 덥석 사올 정도로 그는 바람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거라면, 학교 장학금을 받는 교환학생의 기회 같은 것,ㅡ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양보 정도 해 주어도 좋을 텐데, 그는 제멋대로인 성격 대로 충동적으로 원서를 내고는 불쑥 떠나버렸다. 1년 전의 일이다.

“커피 마시며 듣기에 꽤 괜찮지 않아?”

나카시마 미카의 음악을 처음 들려준 건 나였다. 스산한 음색이 좋아서, 그리 잘 부른다고는 할 수 없는 노래를 어렵사리 수소문해서 중고 CD로 구하고, 소중하게 듣고 들었다.

그는, 나를 허깨비로 만든다. 모든 것이 내게서 시작되었어도 그에게 닿는 순간 그것들은 그의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울린다. 사랑하는 것이, 갈망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듯한 그는 그래서 어느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듯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향유했다.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 방금 볶은 과테말라 커피의 스모키 향은 사치이고, 힘들게 장만한 젠하이저 이너폰이나 청동 드리퍼는 내 것이 아닌 듯이 겉돈다. 할인매장에서 5년 전에 팔천원에 구입한 낡은 백팩, 몇 년이나 된 2002 월드컵 특판 티셔츠, 그런 것이 내게는 자연스럽다. 하여 대학에서의 교환학생 시험에도, 문부성 시험에도 미끄러진 후 번역 알바를 미친 듯 하면서 학비를 마련하는 내겐, 이런 감정까지도 사치일 뿐이다.

“커피, 안 마셔?”

그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나는 설탕을 넣지 않은 짙은 커피에서 먼 나라를 꿈꾼다. 일본에 가고 싶었다. 아니, 어디든 좋았다. 집에 들어가 통곡하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무엇이든, 어디든, 사양하지 않을 거다. 쓴 커피를 들이키고 그를 본다. 귀에 들리는 건 나카시마 미카의 바람을 닮은 노래소리.

붙잡을 수 없고,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꿈처럼 그는 거기에 있으면서도 거기 있지 않아서.

“나쁘지 않네.”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 지윤아, 너는 어떻게 지냈어?”

커피를 음미하듯 마시고 그는 나를 빤히 보았다. 원진희, 알아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네가 1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나는 놀랐지만, 너는 놀라지 않아. 기억하지도 못할테니까.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예상대로라고 해야 하나. 그것 말고는 무슨 일 없었어? 너도 이제 스물 여섯이네.”

마치 자신은 스물 여섯에서 아주 멀기라도 한 듯이.

“특별한 일은 없었어. 대학원 들어가고, 번역 일을 시작하고….가끔 잡지사에서 원고 요청 오면, 교수님 글 대필하고 그러면서 살지.”

태연한듯이 대답한다.

“집은?”

그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헤집는다. 1년 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내가 기억하는 아픔들은 그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한양대 근처에서 자취. 지하철에서 가까우니까.”
“그래도 학교 오려면 한 시간은 걸리겠다.”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그는 일어난다. 그리고 성큼, 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내 눈앞에 있었다. 흠칫 놀라 물러나지도 못하고, 몸을 웅크리지도 못하고, 3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보았다.

“여기서 살아. 학교도 가깝고, 집세도 안 들고.”

그 말을 프로포즈라도 되는 듯이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3년 전에, 이 집과 몹시 닮은 학교앞 16평 오피스텔, 이렇게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 때는 나카시마 미카가 아닌 오니츠카 치히로였지만. 그 오피스텔에서 지금의 18평 오피스텔로 옮겼을 때도 나는 같이 있었다. 두 번째였기 때문에 나는 웃었다. 그는 의외라는 듯 자신의 팔짱을 끼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본다.

“왜 웃어? 우리, 꽤 잘 맞았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리고 너는 갑자기 가 버렸지. 떠남을 준비한 건 나였는데, 떠난 건 너였어. 더 이상 이 오피스텔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작정 짐을 꾸려 나와서는 급히 고시원 방을 구했다. 커피를 끓일 수도 없고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수도 없는 방이었다.

“...난 싫어, 이젠.”

말을 이으려다 입이 막혔다. 그의 웃음처럼 그 입술은 늘 감미롭다. 2학년 아래의 긴 머리 여자애랑 찬란히 염문을 뿌렸지. 그렇게 그 애 입술을 머금던 입술이 내 입술을 더듬으며 탐한다. 혀끝이 입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전처럼 함께 혀를 얽거나, 눈을 감거나, 양 팔로 그 어깨를 붙들거나 하지 않고. 뻣뻣하게 굳었던 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드럽게 풀렸지만 나는 응하지 않았다.

“지윤아.”
“싫어.”

입술이 떨어지고 처음 나온 감미로운 목소리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2005/04/28 15:54 2005/04/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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